착한 사람을 왜 미워할까? 선의 뒤에 숨은 통제와 내면의 저항

회사에서 한 사람을 유난히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동료들에게 꽤 친절했고, 후배들에게도 잘해주려고 했습니다. 먼저 말을 걸고,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먼저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렇게까지 잘해주는 사람을 왜 저렇게 싫어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일 뿐이고, 그 행동을 받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A friendly coworker speaking warmly while another coworker appears subtly uncomfortable and withdrawn

친절한데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사람: 선악 흑백논리의 모순

우리는 보통 사람을 판단할 때 행동을 봅니다.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못되게 굴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는 행동보다 더 미묘한 것이 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말을 걸어주고,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은 것까지 도와줍니다.

행동만 보면 배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고맙기는 한데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관여하지?’

‘왜 저 사람 앞에서는 내가 계속 뭔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지?’

이런 감정이 쌓이면 어느 순간 그 사람 자체가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편함이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얼굴만 봐도 거슬리고, 말 한마디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붙이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우리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의 호의가 내 자율성을 침범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대신 훨씬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저 사람이 싫다.’

사람에 대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느낀 어떤 내면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 사람 자체에 대한 적대감으로 번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배려와 통제는 겉모습만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른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호의를 베푼 사람은 정말 좋은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의도와 경험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배려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간섭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관심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감시받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도움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낼 기회를 빼앗겼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같은 행동 하나를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의 자기결정이론에서는 인간에게 중요한 심리적 욕구 가운데 하나로 자율성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 즉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감각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행동이 아무리 친절해 보여도 내가 선택할 공간을 빼앗긴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마음속에서 저항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저항은 꼭 논리적인 문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짜증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나며, 심해지면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3자의 눈에는 더욱 이상해 보입니다.

‘아니, 저 사람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렇게까지 미워하지?’

하지만 당사자의 내면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압력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A coworker offering help while the other person quietly signals a need for personal space

선의라고 믿는 순간, 선의는 교만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베푸는 행동을 쉽게 ‘선의’라고 생각합니다.

도와주고, 챙겨주고, 좋은 것을 주고 있으니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지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나는 너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그러니 너도 그것을 좋은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면 “널 위해서 그러는 건데 왜 그래?”라고 생각하고, 거절하면 “좋은 마음으로 해줬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는 상대의 감정과 선택보다 내가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에 일종의 교만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까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과 상대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선의는 무언가를 많이 해주는 데만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상대에게 선택할 여지를 남겨주는 것.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해주는 것.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함께 있는 사람이 자기 모습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하는 것.

이런 것도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주었느냐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어떤 경험을 남겼느냐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준 것을 상대가 반드시 가치 있다고 느껴야 한다고 요구하는 순간, 선의에는 다른 무언가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An adult sitting quietly by a window reflecting on a past relationship with a calm and lighter expression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 경험을 생각하면서 저는 인간관계에서 말과 행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에게서는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이상하게 부담을 느낍니다.

똑같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데도 어떤 사람의 도움은 고맙고, 어떤 사람의 도움은 피하고 싶습니다.

말의 내용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금 ‘내면의 에너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초능력이나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감정을 가지고 타인에게 다가갈 때 만들어내는, 말로는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의 분위기와 압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 에너지장을 의식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아주 민감하게 느낍니다.

상대가 친절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계속 뒤로 물러납니다.

성공학의 거장 밥 프록터가 말한 풍요 역시 단순히 돈을 버는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아도 묘하게 전해지는 분위기가 있고, 저는 그것 역시 내면의 에너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에너지는 인간관계의 호감과 거부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고 기회를 받아들이며 커리어와 성취를 만들어가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걸 깨닫고 나니 오래전 제 경험 하나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연인에게서 들었던 “배려심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라는 억울함에 그 말을 수년간 곱씹으며 원망했었죠. 


An adult alone at home reflecting bitterly on a painful memory from a past relationship

지금은 서서히 그 사람의 말이 이해되며,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게 용서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행동과 상대가 실제로 경험한 것은 달랐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용서해야지’라고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더 재미있는 건 그 이후였습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오지랖을 배려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둔 경험이 있었습니다. 두 경험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착하게 잘해주는 것’과 ‘내가 선하다고 믿는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과거의 그 사람도 이해됐고, 오래 남아 있던 감정도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려고 애쓴 게 아니었습니다. 이해가 되니 더 이상 미워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미움은 무관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자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불편함을 이해하기보다 상대를 규정해버리기 쉽습니다.

‘저 사람은 싫어.’

‘저 사람은 이상해.’

‘저 사람은 나를 불편하게 해.’


Multicultural coworkers experiencing subtle tension despite having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the same situation

하지만 그 문장을 조금 다르게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바로 이 질문부터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타인의 적대감을 이해하려고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시선이 나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배려를 불편하게 느끼고, 거리를 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나 역시 상대의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에서 느껴진 무언가에 반응했던 적은 없었는지.

저는 이 질문 앞에서 과거의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래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한 인간관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때 내가 왜 누군가를 미워했고, 왜 그 사람 역시 나를 적대했던 것처럼 보였는지를 다시 돌아보려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 기억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던 미움과 억울함이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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